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벨 페론 (문단 편집) === 부통령 및 대통령으로서 === 1973년 9월 대선에서 후안 페론은 62%라는 득표율로 무난하게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에 따라 이사벨 역시 부통령으로써 직무를 개시했다. 후안은 이미 이 시기에 고령이라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는 지경까지 갔고 결국 임기 1년도 못 채운 채 1974년 7월 1일에 사망했다. 이에 따라 이사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세계 최초의 여성대통령이라 아르헨티나에서는 그의 별명이 La Presidente('대통령'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명사에 [[문법적 성|여성형]] [[정관사]]를 씌운 것)였다. 그러나 이사벨은 남편만큼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낮은 지지율을 회복해 보기 위해 국민의 인기가 높던 [[에바 페론]]의 계승자를 자처했고 외국에 있던 에바 페론의 [[유해]]를 아르헨티나로 송환하는 등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한 노력을 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아울러 이사벨은 당시 사회복지부 장관이자 페론주의 우파에 속한 호세 로페스 레가(José López Rega)를 신임해 페론주의 좌파의 반발을 불러왔다. 당시 페론주의자들의 [[정의당(아르헨티나)|정의당]]은 말만 한 당이었지 사실상 좌우가 나뉘어진 한지붕 두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이 두 세력의 대립은 말싸움이나 정쟁 수준이 아니라, 서로 폭력을 행사하는 수준이었다. 경제정책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후안 페론이 말년에 제정해놓은 노사정 협약에 사측이 반발하기 시작하면서 노사 갈등이 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인플레이션율도 수십% 가량 상승했다.[* 다만 이사벨의 집권기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실업률은 가장 낮았던 시기 중 하나인데, 이는 오일쇼크로 인해서 소련 정부의 재정이 풍족해지며 아르헨티나 농산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고, 임기 초반의 국유화 조치로 일자리가 일단은 많이 늘었던 것에 기인한다.] 더불어 기록적인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기록하게 되자 1975년에 호세 로페스 레가가 추천하여 경제장관이 된 셀레스티노 로드리고(Celestino Rodrigo)는 [[아르헨티나 페소|페소]]화를 50% 평가절하하고 임금과 물가를 동시에 상승시키는 충격 요법을 도입했지만 이는 오히려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페론주의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 중 하나였던 [[노조]]연맹 CGT가 [[총파업]]을 벌이는 굴욕을 당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호세 로페스 레가는 실각하고, 스페인 [[대사]]로 임명되어 사실상 망명을 떠났다. 이후 정치적 혼란과 폭력은 더 심해졌다. 좌파와 우파 간 갈등은 경제위기를 계기로 더욱 심해졌으며, 이사벨 페론이 집권한 첫 15개월 동안 정치적 폭력으로 700명 이상 사망했다. 그러자 1973년 실권 이후 잠시 세를 잃었던 [[아르헨티나군|군부]]가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쿠데타 소문이 정계에 횡행했고, 1975년에 이사벨이 페론주의를 지지하는 인사를 군 수뇌부에 임명해 군을 통제하려 하자 공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쿠데타는 이사벨을 고까워했던 군부조차도 시기상조라 생각했던 돌출행동이었기에 이사벨은 군부와 손잡고 쿠데타를 진압했지만, 이를 계기로 이사벨 페론은 정권 유지를 위해 자신을 고까워하는 군부에 점차 실권을 내주는 실책을 범했다. 군부는 겉으로는 이사벨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지만 1976년이 되면 언론에서조차 쿠데타 가능성을 공공연히 거론할 정도로 이사벨의 입지는 취약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